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스크랩] 우리에 역사에 시작은 어디서 부터일까 바로 발해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 역사에 시초이다



발해의 정치 - 천도 원인을 중심으로

발해는 698년에 대조영에 의해서 성립되고 926년에 거란의 침입에 의해서 망했다. 그가 존속한 기간은 229년이다. 이 기간에 발해가 서울을 옮긴 것은 4차례이며, 처음 수도는 지금의 돈화, 문헌상으로는 구국에 서울을 정하고 있다가 742년에, 다시 말하면 제3대 문왕 대흠무 시기에 중경현덕부로 옮겼다. 중경현덕부는 오늘의 화룡현 서고성으로 거기에서 14년 동안 있다가 755년 상경으로 이주했으며 상경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으로, 발해가 그 곳을 서울로 정하고 첫 30년과 후 132년 그러니까 162년 동안 서울을 잡고 있던 곳이다. 따라서 발해진은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비교적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그 후 다시 동경(지금의 훈춘)으로 이주했고 여기서 9년 동안 있다가 다시 상경으로 천도했다. 그러므로 발해의 문화가 매우 많이 남아있는 상경, 현재의 발해진에서는 7월 7석(까마따기날)에 조선족들이 모여서 운동대회를 하는데, 발해진에 있는 조선족, 목단강, 영안, 심지어 훈춘, 왕청, 도문에 있는 조선족 일부도 그 곳에 가서 운동대회도 하고 밧줄다리기, 널뛰기 등의 놀이를 한다. 운동대회를 하는 장소는 제2궁성터인데(상경의 왕궁성터는 제1, 제2궁성터들이 있음), 그 뜻인즉 조상의 성지에서 놀이를 한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왜 수도를 옮겼을까? 발해는 서울을 왜 4차례나 옮겼는가? 당나라는 서울을 장안에다 정하고 망한 곳도 그 곳으로 한 번도 천도하지 않았는데 반하여, 고구려와 발해는 서울을 옮긴 것이 몇 차례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옮겼는가는 아마도 어떤 연대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이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 때문에 발해는 4번이나 수도를 옮겼을까?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구국(지금의 돈화)에서 중경으로 옮긴 것은 구국의 기후 조건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국 지역은 서고성보다도 매년 매일 평균 온도가 2∼4도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한 차이이며, 구국에서는 모를 심어도 모작기가 짧아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았고 서고성은 기온이 좋고 모작기가 길어서 농사가 잘 되었다. 또 서고성은 해란강이 있어 수량이 많아서 수리관개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나라의 경영을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그 시대의 경제 핵심은 농업이었으니, 농업 경제를 잘 발전시키자면 구국보다 서고성이 더 나았으며, 이것이 주된 원인으로 사료되고 있다. 문왕이 즉위 5년만에 서고성으로 옮겼는데, 문왕 이전 무왕 시기에는 무치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나, 문왕 시기에 와서 문치로 변했으므로, 이 때는 구세력의 영향이 없는 새로운 지역이 요구되었다.

서고성으로 옮겨 온 또 다른 원인은 옛 고구려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 확대하고 그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원래의 고구려 지역과 가까운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때 구국지역, 오늘 돈화지역을 통치했다는 근거는 없기 때문에 이 지역으로 이사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럼 서고성에서 상경으로 갔다가 상경에서 왜 다시 동경으로 왔는가? 그 이유는 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되어진다. 해상의 이득, 일본의 길을 통해서 해상 이득을 보장했다는 것이 첫째 원인이고, 또 다른 원인은 이 땅의 비옥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변에서 제일 광활한 지역인 훈춘벌에서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목적하에 천도하였지만, 사실 이 지역은 바다가 가까워서 해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농업발전의 시도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해상 이득도 크게 얻지 못하자 결국 또 다시 상경으로 이주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여기서 상경으로 이주할 때 문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왕정 내부의 분파 투쟁이 심했으므로 구세력의 통치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천도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발해의 강역 문제

발해는 229년간 존속되었기 때문에 그 강역도 매우 넓다. 발해족은 고구려족을 통치계급으로 하고, 말갈족과 연합되어 있었다. 고구려 전 지역을 거의 다 점했고 거기에 말갈지역까지 점했기 때문에 민족 성분이 고구려족도 있고 말갈족도 있었다. 그럼 어느 문화를 계승했는가? 이것은 중국에서 보는 것과 한국에서 보는 것, 일본에서 보는 것, 러시아에서 보는 것이 각기 다르다. 제1대와 제2대는 무력으로 영토를 확대했고, 제3대 부터는 정치개혁을 통해서 국력을 강화했고, 제10대의 시기에 와서는 강역이 매우 강성했다.

국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역사상에서 해동성의 나라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강역이 어디에까지 미치게 되었는가는 지금 학계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인데, 발해의 강역 문제에 대해서 제일 처음 제기한 책은《신당서》이다. 중국에 있는 《신당서》에서는 "발해 강역이 박삭구로부터 장녕 이남, 장녕을 경계로 해서 당나라와 연접해 있다"고 말했다. 박삭구라는 곳은 지금의 강동으로, 압록강 하구의 강동 근처로부터 지금의 관전현 환인 이남, 그 다음에 덕회, 그 다음에 부여쪽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신당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쪽은 니하(룡흥강)를 경계로 하였다고 적혀져 있다. 이 기제에 의해서 후대의 사람들이 발해의 강역이 대체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믿어왔다. 지금 길림성 사회과학원 원장을 하시던 왕승례선생의 책이 한국에서 번역되었는데, 원래는 《발해간사》인데 번역한 분이《발해역사》라고 번역하였다. 서울대에 계시는 송기호 선생이 번역하였으며, 그 저자는 바로《신당서》에서 제기한 그대로 발해의 강역을 잡아놓았다. 그 이후에 일본사람들이 강역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차차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길림성에 계시는 소녕량, 리점벅 이런 분들은 서쪽으로는 요하를 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요하는 두 가지로써 하나는 서요, 하나는 동요이다. 그런데 동요를 넘었냐 서요를 넘었냐는 정확히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도 미숙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라는 것, 어디를 넘었느냐는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왕승례보다는 좀 더 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그리고,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 계시는 류정춘, 그 분은 요동반도가 다 발해의 땅이다 이렇게 지난해에(94년) 처음으로 제의했으며, 나는 이 견해가 매우 옳다고 동의한다. 그리고 북에 계시는 학자들이 몇 번, "요동반도의 전 지역은 전부 발해의 땅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고학적 근거, 문헌적 근거가 다 구비되어 있다. 한편, 대동강 이북으로부터 압록강 사이에 이르기까지는 어디에 붙여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것은 논의되고 있으나 아직 회답은 없다. 내가 보는 견해는 니하, 니하가 지금 원산 근처인데, 니하 즉, 대동강 이북 요동반도 전부는 발해의 땅이다라고 본다. 이것이 지금 쟁론 중에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북으로는 어디까지 가느냐? 흑룡강, 중국의 흑룡사에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되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데 그 이남까지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나는 이것도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흑룡강 남쪽에 남흑수말갈, 북쪽에 북흑수말갈이 있었는데, 발해는 흑수말갈을 다 통제해서 자기 판도내에 거둬 넣었는데, 그러면 자기 판도내에 거둬 넣은 그 땅이 무엇 때문에 발해의 영역으로 못 들어오겠는가? 나는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흑수말갈이 남이든 북이든, 흑수말갈이 속했던 전 지역은 발해의 영역으로 다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 나온 지도책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을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발해의 문화 - 문자와 고분을 중심으로

발해는 정치, 경제, 문화가 많이 발전했는데, 특히 문화는 상당한 정도로 발전했으며 고구려보다도 확실히 더 발전했다. 문화가 발전한 지금 문자 문제가 매우 많이 논의되고 있는데, 발해 자체의 문자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리강이라는 분이며, 그는 발해가 한자만 사용하고 자기 독특한 문자는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발해의 유물 가운데 적혀져 있는 단편적인 문자들은 다 종합해 보면 한자도 있고 한자 아닌 것도 있다. 모르는 글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이 모르는 글자들을 뭐라고 하겠는가? 한자의 별체제냐 그렇지 않으면 발해가 독자적으로 만든 그런 문자이겠느냐, 라는 논의 중에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발해는 한자를 많이 사용했다. 주로 한자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벽돌이나 기와에 나오는 문자들을 보면, 대부분 한자들을 사용했고, 그 다음에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발해의 제3대 문왕의 둘째 딸을 정혜공주, 넷째 딸을 정효공주라 하는데)의 무덤에서 모두 비석이 나왔는데, 이 비석은 모두 한자로 씌여 있고, 이것을 보아서 한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당연하다고 보여지며, 그 한자 이외에, 발해 자체가 자기 민족의 특징에 맞는 문자도 창조해서 사용하지 않았나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발해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발해 사신을 영접한 영접자가 발해 사신을 보고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니,"내 이름은 우물 정 자 안에 돌석 자다" 또 "네 이름은 뭐냐"라고 물으니 "내 이름은 우물 정 자안에 나무 목자다" 그래서 이런 이름은 옥편에 없기 때문에 일본 영접자는 매우 학식이 높은데 생각하다 못해서 그 자리에서 해석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와서 "네 이름은 우물 정자안에 돌 석자니까 이시노 마구리다마다, 네 이름은 우물 정자안에 나무 목자니까 기노마구리다마다"라고 했다고 한다. 돌을 이시라고 하고, 나무를 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발해 사신이 "일본에도 확실히 학자가 있다"라고 말했던 기록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발해 자체가 만든 문화라고 보여진다. 둘째,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벽돌이나 기와에 나온 문자 가운데 한자로는 도저히 해석하지 못하는 그런 글자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그래서 발해가 독자적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완전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라도 이두를 사용하였고, 고구려도 이두가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보다도 늦게 성립된 민족에게 이두가 없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발해 이후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는데 금나라도 자기 문자가 있고, 그 이후 청나라를 세운 민족도 자기 문자가 있어서 한자와 같이 썼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대체로 발해의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지 않았나 여겨진다.

우리 발해의 유적은 대부분 중국에 있다. 북한에 좀 있고, 러시아에 좀 있다. 중심은 중국에 있고, 그 가운데서도 중심은 연변이다. 최근 몇 년간에 고고학상에 발해 유적을 발굴하려고 매우 애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최근 발견된 하나는 안도현에 있는 동청 발해무덤이며, 동청 발해무덤에서는 계단식 돌곽널무덤을 발굴했다. 돌곽널무덤은 집안의 고구려 무덤에서도 보여지는데, 주위를 돌로 층계를 쌓고 그 위에 막돌을 덮는 형태로써 흙으로 봉토를 덮지 않는데 이것을 계단식 돌곽널무덤이라고 한다. 이것이 동청무덤에서 발굴되고 있다. 이것을 봐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지 않았느냐, 무덤에서 계승하지 않았느냐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그 무덤 가운데서 흙구덩 무덤, 흙을 파고 묻었는데 거기다 화장을 했고, 이것은 말갈족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 지대는 말갈족이 많이 살았으며, 말갈족의 반지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주류는 고구려 문화이지만, 지엽적인 것은 말갈의 문화도 섞여 있었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해서, 동청무덤의 발굴은 돈화현에 있는 육정산 무덤, 정혜공주 무덤, 못지 않은 의의를 갖고 있고 과학성에서도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양수에서 발해 시기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양수의 무덤은, 밑에는 부부간의 무덤을 합장하고 그 위에 여자를 하나 묻고 있다. 밑의 것은 원래부터 묻었던 무덤이고 위의 것은 이장한 것인데 다른 곳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위의 것은 밑에 누운 여자의 위에다가 겹쳐 올려 놓았고, 이것으로 보아서 추정되는 것은 이 남자는 첩과 본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처는 후에 죽고 후처가 먼저 죽었으며, 먼저 죽었던 후처를 딴 데 묻었다가 후에 죽은 본처의 위에 후처를 이장하여 딱 눕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참 희귀한 일이다. 어쨌든 통적으로 보면 이장인데, 발해의 무덤 가운데는 무덤에 돌을 두개, 또는 하나를 놓고 다리 곁, 옆이라든가 머리맡에 많은 뼈를 놓은 것이 있다. 이것은 노예를 순장한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견해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이것은 순장이 아니라 가족장제로 보고 있다. 가족장제는 한 가정에서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여기저기 묻었다가도 거기에 주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분이 죽은 장소에 다시 모두 합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상경에서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어화원 남문터를 발굴하였는데, 지금까지 문이 어디 있는가 몰랐다가 93년도에 와서 발굴하였다.

그 다음, 삼령촌이라는 곳에 무덤이 있는데 상경에 서울을 잡고 있을 때 왕들을 모시던 공동묘지로써, 제1호 무덤에서 반신사자를 발견했다. 사자가 반신인데 잘 분석해 보면, 그 사자가 선사자 혹은 입자식 돌상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1949년 정효공주 무덤에서도 사자가 둘이 나왔는데, 거기서 나온 것은 좌식, 좌작식 석상, 엉치를 꿇고 앉은 사자였고, 이번에 발굴된 삼령촌에서 나온 사자는 선사자였다. 이것은 아주 귀한 것이다. 처음으로 이런 것이 나왔으며, 이 공동묘지에서는 선사자를 밖에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령촌에서 30여미터 동쪽으로 나가서 큰 무덤을 발견하고 발굴했는데, 벽화가 나왔다. 이 벽화는 아주 희귀한 것인데, 지금까지 정효공주 무덤에서 나온 벽화가 우수하였으며, 이 벽화가 또 발굴됨으로 인하여 그 당시 발해 문화의 발전 정도를 알 수 있다. 지난 해 지질탐사를 했는데 그 주위에 몇 개의 큰 무덤이 있으며, 앞으로 그것을 계획적으로 발굴할 계획이다. 정효공주 무덤 근처에서도 지질탐측을 했는데 정효공주 무덤보다도 큰 무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 주위에 20여개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효공주 무덤의 비문에 보면 배장우염곡지서원(陪葬于染谷之西原)이라는 말이 있다. 정효공주를 염곡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다는 뜻으로, 배장이라는 '배'자는 나보다 한 급 높은 사람을 모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육정산에 있는 정혜공주 무덤에도 배장우진릉지서원(陪葬于珍陵之西原)이라고 씌여 있다. 진릉이라는 말에서 왕의 무덤에 릉자를 붙이며, 진자는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 무덤 위에는 탑이 있었는데, 정혜공주 무덤 위에는 탑자리가 없고 무덤위에 집을 지었던 자리가 있다. 탑의 기초의 규모로 보아서 이 탑은 마적달탑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해시기의 탑 자리를 발견한 곳은 세 곳이다. 첫째, 정효공주 무덤탑, 둘째, 마적달 무덤탑, 셋째, 장백현에 있는 령광탑이다. 세 개 가운데 령광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아주 우뚝 솟아 있는데 5층으로 되어 있다. 마적달 탑은 1921년 무너졌는데 그것은 기대에 의한 7층탑이었다. 따라서 정효공주 무덤탑은 이 마적달 탑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보여지며, 이로 보아서 적어도 7층 또는 9층탑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되어진다. 그럼 무엇 때문에 무덤 위에다 탑을 지었는가? 그것은 불교의 영향인데, 당나라에서는 탑을 짓고 탑의 지붕 위에다 사리함을 넣거나 혹은 스님들의 뼈를 불에 태운 것을 넣거나 혹은 불교의 법문을 넣거나 했지만, 발해는 그렇지 않고 왕실 귀족의 시체를 넣었다.

이것은 당나라와 발해의 다른 특징으로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와 자기 지방의 특징에 맞게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고 생각된다. 현재 중국은 정효공주 무덤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벽돌집을 짓고 철문을 하고 누구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일년에 춘추로 두 번 씩 와서 검사하여 안에 벽화가 훼손되지 않았나 보고 만약 손상되었으면 일차로 회칠을 하고 조치를 해서 보호하고 있다.
(1995년 2차 역사기행에 참가하신 방학봉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임)


발해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우리의 과제

발해의 유적 현장에 가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발해사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설명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상경성 내의 박물관이나 정효공주 무덤의 안내판에 있는 중국 학자들의 설명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 자못 다르다. 이것은 발해사 자체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의 자의적 해석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인없는 물건을 서로 내 것이라고 다투듯, 발해 유적에 대해 가지는 주변 국가의 역사적 시각은 자국에 유리한 편으로 맞추어져 있다. 현재 발해의 영토는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있고, 영토상의 영역권을 따지면 발해 지역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발해 지역은 어느 나라에서든 변방지역에 속한다. 이는 발해사에 관한 역사적 해석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이 발해사의 역사적 전통성을 더욱 인정하고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우리 역사의 최초의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점에 비추어 발해사를 이해하려는 입장이 필요하다. 발해사를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을 살펴보면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계 국가로 보는 한편, 남·북한은 고구려계 국가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고구려계 국가로 보고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발해사 연구, 특히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과 관련된 특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북한 유적 (예를 들면, 최근에 발굴된 오메리 절골 유적에서 발견된 금동판 명문의 사적 의의 - 함경남도 신포시 압해산 기슭에서 발굴 : 최하단은 고구려 문화층, 그 다음 두 개의 층은 발해 문화층으로, 이 절터는 고구려에서 발해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음)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대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벗어나 통합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상이한 시각을 지니고 있지만, 현재까지 연구된 발해사 관련 논문은 대체로 1000편 정도 되는데, 이들 중 러시아는 4%, 중국은 53%, 남·북한은 20%, 일본이 23% 정도가 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와 달리, 발해사를 말갈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조건 즉, 발해 유적과 유물을 바로 만질 수 있다는 조건을 지닌 중국은 발해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들을 갖고 있지만, 학술지에 정식으로 보고된 자료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외국 학자 특히 한국학자에게 발해 유적 조사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폐쇄적·민족적 입장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발해의 강역에서 현재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고, 그들의 고구려사 및 발해사 연구 결과와 그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가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유용성과 결부될 때, 그 역사적 사실은 각 국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폐쇄적인 입장이 더욱 강화된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사 뿐만 아니라 고대사의 일부 역시 중국사의 일부로 남아 있고, 중국사의 이런 논리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가서 보지 못했던 정효공주 묘비문에는 아버지 문왕을 '황상'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이것은 황제와 동일한 의미로서 발해가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발해가 중국사 내에서 하나의 지방 정권으로 묘사되고 있는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타당성이 없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91년 8월 연변대학 학술회의장에서 발해사를 비롯한 백두산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며 중국 학자들도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출처 :《발해를 찾아서 - 만주, 연해주 답사기》송기호, 1993)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족 학자들의 연구 논문이나 학술 활동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해야 하며, 또한 국민적 차원의 일반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발해의 역사는 먼저, 현 국가의 자국적 관련성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우리의 현재와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래전 향수로서 음미하고 지나가는 발해 문화가 아닌, 역사의 정통을 고수하고 창조적 문화를 꽃피우려 의지하고 노력했던 그때 당시 발해인의 모습으로 그 실체가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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