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배치에서 지붕까지
*집을 실제로 건축하는 일에 대하여는 실학자들의 고찰이 거의없다. 일터에서 터득한 방법을 간추려 본다. 이제부터는 문헌기록 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현존하는 살림집 사례에 따라 자료를 정리한 내용이다.
(1) 배치법
가난한 살림을 하다 겨우 집을 마련하는 입장에서는 우선 정침(正寢) 한 채라도 번듯하게 짓기를 희망한다. 一자형의 단순한 평면구성이 가장 초보적이다. 그러다 살림 형편이 여유 있게 되면, 단순한 평면의 불편함과 부족함을 보완하는 작업을 하던가 새로 집을 덧붙여 짓던가 한다. 더러는 정침을 衁자형이나 자형으로 편의에 따라 개축하거나, 아니면 옆에 따로 부속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의 편의를 도모한다.
증축하는 부분을 어떻게 배열시켜야 쓸모 있고 합리적인가를 궁리함에 따라 배치법이 개발되고 발전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제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간결한 배치법을 응용하기도 한다.
배치법에는 크게 잇대어 짓는 방식과 넓은 터전에 여러 채의 독립된 집들을 짓는 방식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잇대어 집는 방법은 정침에 이어, 창고와 접객공간, 사랑채를 잇달아 짓는 방법으로 내정(內庭)이 중앙에 넓지 않게 자리하게 하는 ꁁ자형의 집인데 1930년대 도시의 집으로 많이 건축되어 보편화하였다. 이 유형은 날개집, I자, H자 등 다양한 변화를 보이며, 지방에 따라서 황해도나 연평도의 뙈새(뙤새)집, 안동지방의 까치구멍집이나 도투마리집, 울릉도의 투막집, 태백산 북부지역의 정지있는 겹집 등 변화를 가지면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넓은 터전에 여러 채의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는 방식은 삼국시대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고구려시대의 살림집터전인 즙안현 동태자(東坮子)에서 발굴 조사된 집터에서 여러 채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던 흔적이 드러났다.
그리고 4세기에 완성된 고구려 고분벽화(안악 3호분)를 통해 반빗간, 육고간, 외양간, 우물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여러 건물이 배치된 외곽에 담장을 두르고, 담장에 의지하여 행랑채를 지었고(대문과 중문에 행랑채 설치), 필요에 따라 뒷문, 샛문, 편문 등을 설비하기도 하였다.
(2) 평면구성
평면은 공간의 전용(專用)화가 이루어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구성이 달라지며, 입식생활이냐 좌식생활이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원초형 집 내부는 간막이 없는 탁 트인 공간이며, 필요에 따라 가방(假房)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따라서 평면은 단순하였고 바닥은 맨바닥이었다. 이는 공간의 전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필요에 따라 장막(帳幕), 발 등을 이용하여 벽을 대신하였다.
공간의 전용화가 이루어지면서 붙박이 벽에 의해 구분이 명확해지고, 바닥을 이루는 재료는 맨바닥·구들 드린 바닥·마루바닥의 세 종류의 형태로 나타났다.
바닥의 변환에 따라 공간의 넓이와 높이가 책정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하여 집의 규격이 설정되었다. 집의 규격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 신분제도를 국가질서로 유지하는 국가에서는 집의 규모를 설정하려는 제도를 마련한다. 그 예가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는 신라시대 살림집의 제한령(制限令)이다. 신분에 따라 짓고 살 수 있는 집의 평면 넓이를 규정한 것이다.
백성의 집 15尺×15尺, 오두품 18尺×18尺, 육두품 21尺×21尺, 진골 24尺×24尺.
이런 제한령의 제도는 그 이후 시대로 계승되며 조선시대에도 이행되었는데 조선시대 제한령은 『왕조실록』과 법전(法典)인 『경국대전』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번의 개정이 있었다. 시대가 거듭될수록 사는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된 내용으로 조항이 바뀌어갔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경제발전과 향유공간의 증대를 요구하는 삶에 어느 정도 부응한다는 성향을 보인 것이다.
절제와 검약을 덕목으로 숭상하는 선비사회의 정서가 기반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이긴 해도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충족감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기풍이 진작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때로 사회기강이 해이해진 시기엔 법령을 무시한 대규모 집이 건설되었고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자료실의 [건축제도와 법령] 참조)
(3) 기초
⼘터를 고른 후 주추가 놓일 자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따로 기초를 한다.
기초는 의도적으로 기둥을 받쳐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초기의 기초는 땅을 파고 기둥을 묻은 굴주(掘柱)를 돌로 받쳐 주었다.
주초가 놓일 자리에 따로 기초를 하는데 이에는, 돌로 쌓아 초반을 만드는 방식과 입사하여 주초를 떠받게 하는 기법 두 가지가 있다.
입사(立砂)기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고대 유명 건축물,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래의 건축물의 기초였고, 근세까지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방법으로 그 방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땅까지 판다
↓
백토(白土, 석비례)를 넣는다.
↓
물을 붇고 휘젓는다.
↓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고운 분말이 치밀하게 쌓인다.
위의 방법대로 여러 차례 반복한다. 여기서 생땅은 한번도 파지 않은 땅을 말한다.
(4) 기단과 계단
⼘처마밑을 따라 흙·잔디·돌·벽돌·기와 그리고 강회 섞은 삼화토를 써서 마당보다 높직하게 쌓는 것을 죽담·댓돌 또는 기단이라고 한다. 죽담은 작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돌죽담과, 진흙으로 굴림백토를 만들어 토담집에 구조한 흙죽담, 쓰고 남은 기와를 흙에 박아 만든 디새죽담, 말뚝을 받아 무너지지 않도록 쌓은 것들이 있다.
⼘죽담을 구성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낮은 죽담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이 집쪽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막고, 지표면보다 한 단 높게 함으로써 마당에 고인 물이 집안으로 스며들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죽담을 지표로부터 높직하게 쌓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땅의 습기와 곤충을 피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높직한 자리에 주인이 거처함으로써 하인 등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면서 지시할 수 있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기단이나 죽담이 높은 경우에는 마당에서 기단을 올라가기 위한 발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돌을 포개어 놓거나 나무토막을 놓아 딛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섬돌 또는 돌층계라 하는데, 옛적에는 '버덩'이라 불렀다. 버덩이 고급스럽게 구성되어 있으면 이를 '다리(橋)'라 불렀다. 불국사의 청운교(橋)나 칠보교 등이 바로 그런 명칭이다.
섬돌, 계단은 장대석을 보석(步石)삼아 그것만 쌓아 올려 층계를 구성한 것과 그 좌우에 소맷돌을 놓아 장식한 것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일반 백성들의 집에는 소맷돌을 장치한 돌계단은 설치할 수 없다고 『삼국사기』는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조까지 지켜져 내려온 사항이었다.
기단 표면에 섬돌, 버덩을 설치하지 않고, 죽담이나 댓돌에 골을 파 그 안에 층계를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화계(花階) 등에서 찾아보기 쉬운데, 이것 역시 고급스러운 방식이다.
그 외에도 계(階), 단(壇), 월대(月臺), 축대 등의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5) 주춧돌
기둥을 따로 세우는 집에서는 터를 고르고 지경 다지고 방아찧어 단단히 견축(堅築)한 자리나 입사로 기초한 자리에 주초(柱礎)를 놓는다.
주초를 놓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에는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만영(李萬榮)선생은 『재물보(才物譜)』에서 나무 주추에 관해 "나무 주추는 '獳'라 쓰며 그 발음은 '지(支)'와 같이 한다. 옛날엔 나무로 주추 삼았던 것을 지금은 돌로 쓴다."고 하였다.
돌을 주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어느 때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분분한데, 『삼국사기』의 고주몽과 관련된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琉璃王條)에 보이는 기록을 초기단계의 내용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다. 유리왕조의 관련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禮)씨에게 장가들어 아기를 배었는데, 마침 주몽은 부여왕족들의 시기를 받아 압록강 쪽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가 떠날 때 부인에게 "일곱모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유물이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찾아 가지고 나를 찾아오면 아들로 믿겠다."는 말을 남겼다. 장성한 아들 유리가 일곱모난 주추위에 소나무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밑에서 도막칼 하나를 찾아낸다. 이것이 신표(信標)가 되어 부왕(父王)을 만나고, 유리는 고구려 제 2대의 임금이 된다.
『삼국사기』연표에 따르면, 고주몽이 살던 집은 B. C 37년 이전에 지어진 집이다. 주몽이 B. C 37년에 고구려를 개국하였으므로 부여에 살던 집이 윗대 어른이 지은 집이라면 적어도 B. C 60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하게된다. 이미 그 시기에 일곱 모난 주초를 다듬을 수 있는 기법이 발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에겐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현대인들 중에 서구식 기하학에 정통한 분은 7각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 생각한다. 360도의 원에서 7각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론이다. 그런데도 동양에서는 7각을 자유롭게형성하였고, 인도에서는 7각의 동전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 그런 7각이 고구려에서는 B. C 1세기에 응용되었고 고주몽의 집에서는 주초석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돌 다듬는 기법은 상당한 발전을 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집안 태왕릉의 석재 중에 돌을 둥글게 떠낸 쐐기의 흔적을 남긴 것이 있다. 이런 기법은 지금도 매우 어렵다고 고개를 설레는 정도이다. 그런 것을 5세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조선조 중기에 간행된 『산림경제』에는 돌을 써서 주춧돌 놓는 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훈련된 목수 없이 집을 지을 때 참고삼도록 하였다.
초(礎)를 축기(築基, 기초)위에 놓을 때는 반드시 첩토온안(帖土穩安)하여야 되는 것이니, 약간이라도 흔들려 빈자리가 생기면 안된다. 만일 간격이 생겼다고 해서 돌조각을 덧끼워 받치려 해서는 안된다. 이럴 때는 잘 다져진 땅바닥이나 입사기초된 부분으로부터 평평하게 고른 위에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야 동요될 염려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단지 고임돌로 주추를 고이고 밖으로 진흙을 싸발라 가리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주초 바닥이 비어서 물이 스며들면, 겨울에 얼어 부풀어올랐다가 봄에 녹아 내리면서 가라않아 주추가 기울어지고, 심하면 기둥이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초를 놓는 일은 아주 신중히 해야 한다.
고구려의 발달된 기법에 비하여 너무나 대조적인 양상을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였을 것이란 소박한 생각을 뒤흔드는 사상(事象)이다. 건축기법이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절정을 구가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사실이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B. C 3000년경에 이미 화강암을 떠낼 때 발달된 기법을 구사하였다 한다. 또 그런 자취를 오벨리스크를 다듬던 화강암 채석장에서 木壽는 직접 보기도 하였다. B.C 1세기의 고구려의 일곱모 난 주초석 다듬는 일이나 5세기 이전 태왕릉의 둥글게 떠낸 석재는 인류가 발전시킨 기법의 유구함에서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었다.
(6) 기둥
주춧돌 위에 세우는 나무를 기둥이라 부르는데, 이 기둥은 공간 구성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이다. 고어로는 긷·기디· 기둥·지동 등으로 불렸으며, 사전적인 의미로는 ①집의 간살을 표준하여 배열한 주초 위에 세워 보·도리 등을 받치는 둥글거나 네모진 굵은 나무. ②가구(架構)를 위하여 세우는 짧은 기둥(童子柱). ③머름이나 난간을 구성하는 짧은 기둥(어의동자·머름동자)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림 (신영훈, 한국의 살림집上, 열화당, p.282 중, 하)
기둥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주춧돌과의 접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야 하고, 수직이 되도록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 기둥의 수직선을 측정하는 일을 '다림 본다'고 하는데 다림 보는 방법에는 정식과 약식의 방법이 있다.
정식은 기둥 사면에 추를 늘어뜨려 수직을 보는 것이고, 약식은 휴대용 장대 끝에 추를 달아 기둥 네 귀퉁이를 돌아가며 측정하는 방법이다.
기둥 밑둥과 주춧돌이 밀착하도록 하는 작업을 '그랭이질' 또는 '그레질'이라 한다. 그랭이 하는 일은 아주 정밀한 작업이어서 도목수가 맡아 한다. 그랭이하는 일을 '그레질'한다고도 말한다.
⼘그랭이 하려면 보통 얇은 대나무로 깎아 만든 '그랭이 칼'이 있어야 한다. 마치 핀셋 모양으로 두 다리가 벌어지기도 좁혀지기도 하는 H형이다. 그랭이를 시작하면 벌린 한 가닥을 주춧돌에 밀착시키고 나머지 한 가닥은 기둥몸에 닿도록 한다. 그리고 주춧돌에 밀착한 다리에 힘을 주면서 기둥 둘레를 한 바퀴 돌린다. 기둥이 올라앉을 주좌(柱座)의 돌 생김이 들쭉날쭉한데에 따라 그랭이 칼이 움직이므로 기둥에도 그와 같은 선이 그려지게 된다. 일종의 쌍구법(雙句法)인데, 같은 형상이 표시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기둥을 잘라내면 주춧돌 주좌의 들쭉날쭉한 부분과 영락없이 부합된다. 그랭이질이 능숙하여 기둥 절단이 정확하면 기둥과 주춧돌이 정교하게 밀착되어 습기도 스며들지 못하고 벌레 역시 들어갈 틈이 없다.
그랭이질 한 후 기둥 밑둥의 안쪽부분을 약간 깊숙하게 파낸다. 마치 굽을 만들 덧 하는 것인데 기둥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이 공간에 소금·간국·백반을 넣으면 방충과 방부의 역할을 한다.
그랭이가 끝나고 기둥을 제자리에 세우면서 시각의 착각을 교정하는 여러 가지 기법을 행한다. "귀솟음·배흘림·오금법" 등이 그 방법이다.
·귀솟음
귀솟음은 귀기둥이 다른 평주들과 똑같은 높이이면 틀림없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도 낮아 보인다. 역시 무거워 보이는 귀공포와 추녀 때문이다. 맞배일 때에는 박공 때문에 역시 그렇게 보인다. 처마의 곡선이 사뿐히 들어올려진 상황이면 귀기둥은 더욱 처져 보인다. 그것을 교정하기 위하여 귀기둥의 키를 높게 하는데, 이 기법을 '귀솟음법'이라 부른다. '귀솟음법'은 결과적으로 처마의 곡선을 부드럽게 휘어 오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배흘림
배흘림은 기둥의 배를 볼록하게 다듬는 기술로 수직인 기둥을 바라보면 윗부분이 넓게 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는데, 이를 보정해주기 위한 기법이다.
배흘림에서 배가 가장 부른 지점은 기둥의 높이를 H라하고 배가 가장 부른 지점의 높이 h라 할 때, h의 지점은 집주인을 기준으로 하여 주인이 대청에 앉았을 때의 눈높이와 마당에 서 있을 때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한다.
이 높이는 삼국시대에는 1/3H 지점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그 높이가 약 30㎝정도 올라갔으며, 조선시대에는 거의 1/2H 지점이었으며, 임란 후에는 배흘림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금법
수직으로 서 있는 귀 기둥에 비하여 처마의 귀를 떠받드는 추녀는 처마 깊이와 서까래의 경사도에 따라 추녀 끝이 땅으로 숙어내린 형상으로 걸리게 된다. 추녀의 중간 부분을 귀기둥 위에 두고 머리는 앞쪽으로 뒷 뿌리는 안쪽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공중에 떠 있는 추녀 앞머리가 이내 쏟아져 내릴 듯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따라서 귀기둥 조차 머리가 밖으로 벌어진 듯 느끼게 된다. 기둥을 막상 측정해 보면 수직이 틀림없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밖으로 머리가 쏠린 듯 비쳐지기 때문에 이를 교정하기 위하여 기둥머리를 약간 안쪽으로 기울도록 해주는 것이다.
(7) 수장
기둥과 기둥사이에 건너질러 꾸미는 나무들을 통틀어 수장이라 하며, 여기에 쓰이는 재목들을 수장재라 일컫는다. 사용되는 재목은 주로 켜낸 각재(角材)들이다. 이들은 가늘고 굵고 짧고 길고 하여 각양각색이며, 같은 굵기의 나무라도 쓰이는 장소나 용도에 따라 이름이 서로 다르고 마름질이 달리 되기도 한다. 그만큼 수장재는 복잡하고 일거리도 많아서 목수들이 기둥을 세우고 가구(架構)하여 서까래를 건 뒤에 기와장이들이 산자엮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수장들이는 일을 한다. 집짓는 대부분의 시간이 이일에 소모된다. 수장재는 끼고 박고 잇고 붙이고 덧대는 일들이어서 '이음법'과 '짜는 법'이 복잡하게 발달되어 있다.
수장재는 전용공간의 향유가 분명해지면서 벽체가 간막이로 고착되었을 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수장을 설치하는 데에는 성격상 벽체와 문얼굴과 마루 등 세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층집이면 멍에와 층층다리, 난간이나 머름도 이에 해당한다. 벽체에는 벽장·다락·개흘레가 소속된다.
① 문얼굴
출입하거나 양명한 빛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문짝이나 창을 내려고 기둥 사이에 설치하는 수장과 벽선의 짜임을 통틀어 문얼굴이라 일컫는다.
② 머름대
머름대는 중국 건축물에는 없는 구성이나 한옥에서는 여러 구조 가운데에서도 가장 발달하였던 부분이다. 머름대에는 짜는 머름과 통머름 두가지 유형이 있다.
머름대의 높이는 앉은 사람의 가슴께까지 오는 적당한 높이이다.
머름은 방풍 역할을 하기도 하며, 내부공간을 그윽하게 해주는 차폐의 역할도 하고, 방안에 앉은 사람은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문갑등 가구의 높이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8) 담벼락
담벼락은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돌벽, 귀틀, 토벽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질이 좋은 흙이 곳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흙담벼락이 많이 보급되어 있다.
토벽을 치는 기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흙만을 써서 쌓는 기법으로 여기에도 두꺼운 널빤지로 거푸집을 만들고 그 속에 흙을 집어넣어 회방아 찧어가며 키를 높여가는 방식과 목침만큼의 크기로 흙벽돌을 만들어 쌓고 안팎으로 맥질하여 벽을 치는 방식으로 나뉘고, 또 다른 하나는 중깃(木心)을 만들고 그것에 의지하여 흙을 바르는 기법이다.
벽돌을 쌓아 담벼락을 만드는 기법에도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백제 때의 집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블록이 있다. 상자전(箱子塼)이라 부르는데, 현대식 시멘트 블록과 그 형태가 같으나, 다만 안팎의 면에 아름다운 무늬를 장식한 점이 다르다. 다른 하나는 반전(半塼)이라고 하는 지금의 벽돌과 비슷한 형태의 것을 쌓아 벽체를 이룩하는 방식이다. 공주(公州)에 있는 백제 무령왕의 전축무덤에서 볼 수 있는 축조기법이 그것이다. 고구려에서는 반전에 무늬와 함께 글자를 새겨 넣기도 하고 그 길이를 더 길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벽(烩壁)쌓는 기법에도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 전돌을 반듯하게 갈고 다듬어서 사춤없이 쌓는 고급의 방법, 둘째, 사춤에 삼화토를 넣어 가며 쌓는 방식이 그것이다. 조선조에서도 벽돌로 쌓는 담벼락이 있었고, 또 벽돌과 사괴석을 함께 사용하는 반담·온담·하방벽(下枋壁)과 화방법(火防壁)이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보호벽으로 토담벼락 밖에 용지판을 세우고 덧쌓는 것이 보통이다.
(9) 도리와 공포구성
기둥위에서 보와 十자형으로 교차되는 나무 중에서 서까래를 받는 부재를 도리라 한다. 둥근도리를 굴도리라하고 네모지도록 깎은 모양의 도리를 납도리라 하는데, 납도리에는 장여가 없을 수 있으나 굴도리에는 대부분 받침장여를 둔다. 장여는 도리를 받는 폭이 좁고 운두가 높은 각재인데, 둥근 도리몸을 편안하게 받기 위하여 윗부분을 둥그스럼하게 판다. 반대로 도리의 배바닥을 장여 폭만큼 깎아내어 각재인 장여와 밀착되도록 하기도 한다.
장여의 폭은 보통 집짓는 데의 기본단위가 된다. 이 폭이 갖는 수치는 구고현법(勾股弦法)에 따라 이루어지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가 보통 장여의 운두가 되는 것이다. 장여는 주도리뿐만 아니라 중도리와 종도리에도 첨가되는데, 이는 도리의 인장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도리의 이음 부분을 떠받아 주는 역할을 아울러 하기 때문이다.
장여는 공포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인 구실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공포는 기둥위에만 공포를 두는 주심포, 기둥이외에 주간에도 공포를 구성하는 다포계, 조선조 초기에 개발되고 임란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익공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0) 가구
기둥을 세우는 일은 들보를 얹어 지붕을 구성하는, 즉 집을 얽어나가는 첫단계 작업이다. 기둥이 벽체를 이루게 하는 골격이라면, 들보는 지붕을 형성하는 골격이다. 지붕을 받게 하기 위하여 들보와 여러 가지 부재들이 이루는 복잡한 조합을 통틀어 가구(架構)라 일컫는다. 가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따라 기둥을 평주만으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고주도 세워야 할 것인가가 결정된다. 이는 가구가 떠받아야 하는 엄청난 지붕 무게를 기둥이 어떻게 지탱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에 따른 것이다.
살림집에 있어서는 가구구성의 기본형은 삼량집이다. 삼량가(三樑架)라고도 부르는 이 구조는 기둥머리를 싸잡아 씌워 상투걸이한 들보 하나가 기둥을 건너지르게 하고, 그 기둥 위의 보 등에 안장(도리가 앉도록 보 끝을 파낸 부분)을 꾸미고 그곳에 주도리를 건다. 주도리는 앞뒤의 기둥에 각각 걸리므로 두 개가 되고 들보 중앙에 마루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도록 만든다. 이와 같이 2개의 주도리와 1개의 마루도리, 도합 3개의 도리에 서까래가 걸린다고 해서 삼량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삼량집은 기둥과 기둥사이가 좁고 보의 길이도 짧다. 이것은 도리에 걸리는 긴서까래(長椽)의 한정된 길이를 고려해서 그렇게 좁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서까래를 받을 수 있는 도리 두 개를 설치하고 서까래를 긴서까래와 짧은서까래로 만들어 도리가 걸리게 되면 이를 오량집이라 일컫는다.
오량가 구성의 법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뒤의 평주만으로 구성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평주 사이의 앞쪽으로 고주 하나를 더 세우는 방법이다. 고주를 채택하면 앞퇴가 구성되는데, 이는 방과 앞퇴를 만들어야 하는 살림집에서 사용되는 법식이다. 대청과 같은 부분에서는 고주 없이 대들보를 평주 사이에 건너지른다. 그리고 중대공을 올려놓아 종보를 받게 하는데, 이때에 두 가지의 법식을 쓴다. 지붕 물매를 날카롭게 하는가 아니면 뜨게(완만하게) 하는가에 따라, 삼분변작법(三分變作法)이나 사분변작법(四分變作法)을 쓰게 된다. 삼분변작법은 앞 뒤 기둥 간격, 즉 대들보를 3등분하고 1/3되는 곳에 중대공을 각각 배치시키는 법식이고, 사분변작법은 대들보를 4등분하여 1/4되는 곳에 중대공을 세우는 법식이다. 이 변작법에 따라 서까래의 물매가 생기는데, 그 물매의 각도를 '자꺾음장예'라 해서 '네치자꺾음장예'니 '여섯치자꺾음장예'니 구분하여 부른다.
오량집에 도리 둘을 첨가한 칠량집, 여기에 또 도리 둘을 첨가한 구량집, 여기에 또다시 도리 둘을 첨가한 십일량집도 있었을 터이나 현존하는 살림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살림집은 삼량과 오량이며, 또 안채는 오량이나 안채에 이어져 꺾이는 부분에서는 삼량으로 구성되는 수도 있다. 아주 드물지만 반오량(半五樑)인 법식도 있다. 반오량집 가구를 시삼각집이라고도 부르는데, 반오량은 고주를 일부에 써서 유용한 공간을 구획하려는 의도에서 채택되는 법식이다.
(11) 천장
천장은 천정(天井) 또는 조정(藻井)이라 부르기도 하나, 조정은 고급 살림집의 화려한 천장을 일컫는 것이고 천정은 우물반자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로는 천장이 옳다.
천장은 구성에 따라 삿갓천장·연등천잔·빗천장·반자천장으로 나뉘는데, 반자하는 천장은 꾸밈에 따라 종이반자·평반자·고미반자·우물반자·빗반자로 분류된다. 여기에다 뿔천장·귀접이천장·궁륭(穹弑)천장을 더할 수 있겠는데, 이 세가지는 상대(上代)의 유형에 속한다. 상대의 유형으로는 이 밖에도 천막(天幕)·가방(假房)·가마와 같은 모양의 천장이 더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집의 구성에서 천장은 가구와 지붕에 직결되어 있다. 특히 지붕과는 안팎의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서, 바깥에서 보는 형상이 지붕이고 안쪽에서 올려다보는 구성이 천장이다. 반자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까래를 기준으로 하여 서까래와 산자의 안쪽은 천장이 되고 서까래와 반자의 바깥쪽은 지붕이 되는 그야말로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관계이다.
살림집에서는 연등천장이 주류를 이루는데, 연등천장은 서까래 사이를 앙토한 모습대로 그냥 두는 상태를 말하는데, 앙토는 일반 살림집에서처럼 초벽으로 끝나는 것이 있고, 제택(第宅)에서처럼 사벽(砂壁)이나 재사벽(再砂壁)하는 수가 있는데, 가묘에서는 궁전이나 사찰의 법당들에서처럼 분벽(粉壁)되기도 한다. 재사벽이나 분벽할 때에는 서까래와 더불어 단청되기도 한다. 앙토 대신에 골개판을 까는 수도 있는데, 이는 고급스러운 처리로서 이 방식이 후대에는 널빤지를 구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이 보급되지 못하였고, 나무가 흔했던 고대에는 나무를 켜는 일이 어려워 골개판의 설치는 흔치 않았다. 골개판을 설치한 집이라면 대개 단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앙토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분칠되는 것이 보통이다.
앙토를 하거나 골개판을 깔거나 하는 일이 삼량집이나 오량집에서 긴서까래에 의지하고 시공되었을 때, 긴 서까래는 주도리 밖으로 뻗쳐 나가 처마를 이루게 되는 것이므로, 앙토와 골개판은 처마 부분에까지 계속되도록 설치되게 마련이다. 이 구조의 연장은 산자나 적심, 느리개의 경우로 일반이다. 같은 앙토와 골개판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위치하는 부분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서 도리 밖의 부분은 처마라 한다.
(12) 처마
서까래가 주심도리에 걸렸을 때 바깥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처마라 부른다. 기둥 밖의 부분이 이에 해당되는데 정면과 측면의 구성이 다르더라도 뭉뚱그려서 처마라 일컫는다. 처마의 구성요소는 서까래·부연·평고대·추녀·사래·박공(박공은 지붕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이도 있다)이다.
처마는 넓은 의미에서 서까래가 이루는 부분을 통칭하고, 맞배지붕의 경우는 합각 부분까지도 포함한다. 서까래가 이루는 부분중에서 주도리(柱道里) 안쪽을 천장이라고 부르고, 천장에 이어지는 주도리의 바깥부분을 처마라 일컫는다. 처마는 삿갓천장에서처럼 서까래 사이가 앙토 없이 만들어진 것과 연등천장처럼 앙토된 것 등 두 가지가 있고, 서까래 끝에 다시 부연을 걸러 처마를 깊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이때 부연 사이의 간격에는 널빤지가 덮여 막음이 되는데, 이것을 '골개판'이라 부른다. 만일 부연을 산자처럼 건너지른 널빤지가 있어 덮개가 되었다면 그것은 '횡개판'이라 일컫는다.
서까래만으로 된 구성을 홑 처마라 하고 여기에 부연이 첨가되면, 이를 겹처마라 하는데, 이때의 서까래는 그 끝이 둥글고 부연은 끝이 네모진 것이 보통이다. 더러 서까래를 네모지게 만들고 이를 각(卒)이라 부르나, 네모진 서까래는 부연(浮椽)과 다르다.
(13) 지붕
서까래와 도리가 한 몸이 되도록 접착하는 일까지 목수가 끝내고 나면 기와쟁이들의 일이 시작된다.
지붕의 구성은 산자깔고, 적심과 느리개를 설치하고, 지붕 전체에 골고루 흙을 덮는 보토작업을 한 후 바닥 기와 잇는 순으로 이루어진다.
지붕의 기능은 우선 빗물 처리에 있다.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지붕 물매 각도가 달라진다. 물매가 싸게(급하게) 잡히는 집들은 강우량이 많은 고장의 것이고, 강우량이 적은 지역이면 물매가 뜨다(완만하다). 물매가 뜬 집의 처마는 얕다. 얕다는 것은 기둥과 처마 끝까지의 사이가 짧다는 뜻이다. 반대로 물매가 싸면 처마가 깊으며, 따라서 기둥과 처마 끝까지의 사이가 길다. 그러므로 처마가 깊다는 말로도 표현된다. 처마가 깊거나 얕음에 따라 지붕이 차지하는 크기 즉 갈비(지붕의 너비)는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되는데, 이것의 면적은 기둥이 구성하는 주간의 평면 넓이와 상관된다. 지붕이 크고 처마가 깊으면 가구에서 공포가 발전하여야 된다. 깊게 구성되는 처마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하여 긴서까래의 무게를 버틸 구조물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초가집에서 처마 깊이만으로 낙수물 처리가 어려운 지방, 즉, 가구만으로는 충분한 구성이 어려울 경우에는 '달개'를 처마 끝에 잇대어 낸다. 이것은 특히 남쪽지방에서 크게 발달하였고, 지금도 제주도의 초가집들에서 차양과 달개를 볼 수 있다. 달개가 달린 집을 '달개집'이라고 부른다.
더러 소나무 가지를 두름 엮어 다는 '송청'도 있다. 고려시대 이래의 구조이다.
천연적인 자재가 지붕에 쓰이던 시절에는 자연, 식물성·동물성·광물성 용재가 지붕을 이루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와지붕이 등장함에 따라 지붕의 구조는 다양해 졌고, 장식적인 기법은 함께 발달을 보게되었으며 기와집은 다른 자재로 지붕을 있는 집보다 격조 높은 집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왕실·관아·사사(寺社)·고급 건축물·부잣집 등은 지붕을 기와로 엮게 되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자연에서 직접 채취 가능한 천연용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출처 : Tong - song__1004님의 ArChI。통
http://tong.nate.com/song__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