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5일 금요일

나홀로 귀틀집 짓기

어느분의 글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다른곳에서 본글인데, 좋은글 같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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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이 사랑방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카페가 아닙니다. 오해없으시길.... -.-;; )
사랑방을 둘러보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고, 몇해전 경남의 어느 산골짝에서 뵈었던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쓸쓸함, 지독한 고독…., 그리고 공중의 새를 보라던 해맑은 얼굴도 스쳐갑니다.
가끔씩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허기진 사람처럼, 암컷에 굶주린 야수처럼, 글을 쓰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저 허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세상에 대해 구애를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야할 모양입니다.
사랑방을 둘러보면서 작지만 넘기 어려운 정서적 차이 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래도 일상의 모양 만큼은 비슷할 듯 하여 제가 집짓는 얘길 써 볼까 합니다.

아참, 먼저 제 소개를 드려야죠.
저는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가 시작하는 곳에 홀로 집을 지으며, 농사짓는 시늉도 하고,
본업이 술을 마시며 흥얼거리는 것으로 알고 지내는 마흔이 조금 넘은 사내입니다. 그럼, 얘기를 시작할까요.

무작정 떠나기
2년전 가을이었습니다.
서울 변두리 어느 시골 마을에 농가주택을 세 얻어 살고 지내던 사내는 문득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떠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해가며 떠나는 것이 순리지만 일상의 묻혀가는, 그리고 사고무친의 땅에서 적막함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던 탓이지요.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집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사내는 서울의 아파트 한평값도 안되는 돈을 손에 쥐고 살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다 써버리고 지하철을 전전해도 좋다. 거기에도 생생한 삶이 펼쳐지고, 어쩌면 삶의 진수를 빼먹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내는 그런 생각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강원도의 어느 산장을 찾았습니다.
 여행중 두어번 들러 소주를 마시며 친해졌던 산장지기 선배에게 다짜고짜 살 터 하나를 만들어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소개를 받은 곳이 오대산과 계방산 사이의 어느 계곡에 있는 백평도 안되는 조그만 땅이었습니다.
그 즉시 사내는 집을 짓는 것을 전제(토지형질변경을 조건으로)로 하고 계약을 했습니다.
길을 나선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텐트 하나를 구해다가 쳤습니다.
언제 집을 지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는 그 텐트에서 일년을 보냈습니다.
계획과 달리 토지형질변경이 되지 않아 계약은 파기됐지만,
마침 인근 건축공사장에서 막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난해 계약이 파기되면서 새로 구입한 땅이 지금 집을 짓고 있는 곳입니다. 무려 천 삼백평이나 됩니다.
그중 절반 가까이가 실제로는 산이니까 쓸 수 있는 농지는 반쯤 될 겁니다. 평당 만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거기다 집을 짓기 위해 토지형질변경을 하니까 토지에 들어간 비용이 대략 2천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땅 구하기
땅이 좀 넓었으면 했습니다.
집을 짓고 나도 농사도 지을 수 있게 천평에서 2천평 정도쯤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뜻을 가지고 이웃이며, 업자에게까지 얘기를 건네놓았습니다.
일년동안 산속에다 텐트치며 막일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땅값가지고 장난치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몇몇은 그 돈으로는 못구한다고 웃었습니다. 며칠후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땅을 구했습니다.

조금 높습니다. 해발 9백 5십미터 정도 된다니까 워터월드가 되어도 끄떡없습니다.
오대산에서 계방산, 태기산으로 이어지는 차령산맥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
아침이면 아랫마을에 안개가 자욱해도 집터에는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비가 갤 때면 눈 높이에서 구름이 수평선을 이룹니다.
맑은 날 아침 산책길에는 오대산 저편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바라보고, 계곡을 타고 빠르게 흩어지는 안개들이 눈부십니다.
먹고 사는 건 몰라도 적어도 땅값 때문에 귀거래의 꿈을 접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가얻기
상대농지(밭)를 샀으므로 대지로 전용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런데서 사실은 콱 막힙니다.
용어도 생경하고 절차도 까다롭고. 특히 사내처럼 관공서 기피증이 조금 심해서 심지어 “만권의 책을 읽어도 법률책은 읽지 않는다”는 동파의 시구절을 읊조리는 사람에게는 여간 짜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대행해주는 업체가 있습니다.
“그래, 그들도 먹고 살아야지.”


측량해서 대행해주는 업체에 80만원을 냈습니다. 이럴때마다 용감해 집니다.
그래서 지난해 8월경 무난히 백평을 대지로 전용받았고, 또 무슨 명목인가 3백40만원을 내라고 하더군요. 아! 대체농지조성비.

이 나라 법률의 정신 중에는 아직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사대부들이 읊조리던 농자천하지대본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돈이 모여서 간척사업을 했다면, 오-, 사내는 범죄자입니다. 주머니 털리고 죄의식 갖기. 사내는 화가 났습니다.

“관공서가 아직도 너무 가까이 있어.”
아,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무원이 형질변경에 대한 조사를 올 때 길이 제대로 나 있어야 한다고 해서 15만원주고 포크레인을 반나절 불러서 터로 올라가는 길을 정비했습니다. 뭐 하자는 짓인지! 하여간 집터까지 가는 대부분의 농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만 2백미터 가량 비포장 언덕길이 비만 오면 패이고 해서 트집을 잡고 허가를 안내줄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뭐하자는 짓인지? 내 땅에 내가 집을 짓고 살겠다는데…. 누가 포장을 해달라고 그랬나, 길 보수를 해달라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했더니 땅을 판 사람이 ‘이 사람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하나’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군요.(역시 허가조건부로 계약을 했으니 그 사람도 허가에 민감하게 반응했죠) 할 수 없이 포크레인을 불렀습니다. 그 때문에 지출된 15만원....

15만원은 정말 피 같은 돈이었습니다.

허가를 얻었으니 이제 집을 지어야죠. 그런데 작물이 들어서 있어서 수확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더덕, 당귀, 들깨. 당년에 수확할 수 없는 더덕은 사내가 인수하기로 하고 당귀와 들깨 수확을 한 연후에 기초공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 사내는 건축공사장에 인부로 나가며 공사비도 벌고 집짓는 일을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이 길어지는군요. 혼자서 집짓는 얘기는 다음에 쓰지요.
사람을 쓸 경제력도 없고 도와준다고 사람이 온다해도 잠재워줄 곳도 없고, 밥해줄 사람도 없는 형편이라 혼자서 밥해 먹어가며 집을 지었습니다. 사실은 아직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들땐 까짓거 안지으면 어떤가 하고 일손 놓고 술한잔 마시고 늘어지게 잡니다.
그래도 어딥니까? 얼마전엔 텐트생활 청산하고 다락방이라고 2층에 두평짜리 방을 꾸며서 짐을 옮겼는데요.

거기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밭을 봅니다.

미처 갈지 못한 밭은 망초와 쑥대밭으로 아름답고, 농사라고 지어놓은 옥수수는 집짓는 와중에도 두번이나 풀을 매 주었지만 거름기가 없는 탓인지 앉은뱅이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까짓거 옥수수 안먹으면 어떻습니까? 걱정을 하기로 하면 세상 모든 짐을 다 져야하고 내려놓기로 하면 팬티까지 벗어놓고도 가볍게 춤출 수 있는 산꼭데기에서 말입니다. 그럼…..

전기 끌어오기
산속에 전기없이 집짓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내는 용기도 없었고 그런 독종이 못됩니다.
그래서 전기를 끌어와야겠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신주가 있는 곳에서 200미터(전신주 4개 설치)까지는 기본료로 가설해주지만 그 이상은 자부담으로 미터당 4만원이 넘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 전봇대에서 200미터가 넘는 곳에서는 전기없이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내의 집터는 3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도 4백만원이 넘는데 어디 엄두를 낼 수가 있어야죠.

가정용 풍력발전은 어떨까, 전기없이 살 수는 없을까 등등 오만생각을 했지요.
전기라? 다 좋은데 일년간 텐트생활 경험으로 냉장고없이 살 자신이 안 나더군요(하긴 아직까지 냉장고가 없습니다.).

때 마침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21세기에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위한 필수적인 요소고, 따라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에 속한다.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내의 가옥에 대해 전기가설을 해줄 의무가 있다......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정부투자기관이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만든 규정쯤은 사내가 잘 응용해서 전기가설을 해도 나쁘지 않다

생각이 거기까지 나가더군요.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서 약간의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대강은 그르지않다는 거였죠.
편리한 소피스트적 발상, 그게 또한 사내의 특기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도움을 얻어 200미터 떨어진 곳에다 농업용전기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난달 한번 더 가정용전기를 신청해서 마침내 집에까지 전기를 끌고 왔습니다. 모두 75만원이 들었죠.
주로 당하고 사는데 이럴 때라도 조금씩 돌려준다며 마지막 전봇대를 놓던 다음날 아침에 똥을 누면서 낄낄거리고 웃었습니다.

하여간 그렇게해서 지난해 10월에 농업용전신주를 가설했는데 문제는 계량기를 달아주지 않는 겁니다.
농사철 다 끝났으니 내년 봄에 달아준다는 겁니다. 할말이 없더군요.
결국 텐트를 옮기지 못하고 30분거리를 오가면서 기초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전기는 그렇고 돈 잘버는 한국통신은 더 합니다. 전화전신주는 2개만 기본이고 나머지는 자부담입니다.
그래서 전화는 아주 포기하고 삽니다. 다행히 산꼭대기라 휴대전화가 잘터져서 공사시작과 함께 휴대전화를 구했습니다

집터닦기
집터를 닦고 기초를 하자니 평면도를 그려야 합니다.
대개들 모눈종이를 사다가 그려보고, 조금 심한 사람은 수수깡을 사다가 모형을 만들어보기까지 한다더군요.
혹시 공간치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으면 만들고요. 사내는 평면에 그려진 입체도형만 봐도 머리가 찌끈거립니다.
도대체 공간감각이 없습니다. 미술은 항상 낙제였을 만큼 공간에는 백치 수준이지요.
그런 사내에게 공간을 창출하는 건축 자체가 무리입니다.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합니다.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사내는 평면도 한번 제대로 그려보지 않고 집터닦기를 시작했습니다.
평면도 대신에 넘버3 송강호의 무대뽀정신이 사내의 무기였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거였죠. 경험적으로 가능하더라 이겁니다.

집터를 닦아줄 장비를 수배해놓고 이른 아침 집터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중순이었으니 서리가 내리던 무렵입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집터를 거의다 오를 무렵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청명한 아침의 가을하늘입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입니다. 눈을 돌려 지나온 아랫마을을 바라보자 안개, 안개, 안개의 바다였습니다. 안개의 바다에 높은 산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섬처럼 떠 있는 겁니다.
그랬구나! 아침은 또 이렇게도 열리고 있었구나! 사내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머리의 회로마다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공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퍼질러 앉아서 소주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싱겁게 끝났습니다. 장비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포크레인 한대로 집터를 닦고 거푸집을 세울 곳의 버림콘크리트까지 타설했습니다. 단 하룻만에.

기초공사
줄기초를 합니다. 귀틀집을 지을 계획이었습니다.
줄기초는 가장 간편하게 거푸집을 세우고 레미콘을 갖다 붓는 것으로 정했죠. 트럭도 빌리고 거푸집용 판넬도 빌려서 실어 왔습니다.
(물론 공짜로-그간 공사판을 다닌 인연으로) 트럭에 판넬을 싣고 올라오는데 집터 백미터를 남기고 차가 헛바퀴만 돌고 있었습니다.
도리가 없었죠. 그 자리에서 내려놓고 몇번에 나눠서 싣고 올라갔습니다.-집터로 오르는 마의 백미터, 거기가 지금까지 속을 썩입니다. 철근은 트럭에 실을 수 있도록 4미터로 잘라서 사서 가져왔습니다.

철근을 잘랐으니 부실공사라구요? 맞습니다. 부실공사입니다. 하지만 제가 늙어죽는 날까지는 끄떡없을 겁니다.

아님 주저앉아버리면 또 어떻겠습니다. 귀거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온 곳으로 돌아간다! 무덤을 본택(本宅)이라 한다 하니
알맞은 때 무너져준다면 한번에 두개의 집을 완성하니 그 또한 건축의 예술적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여하튼 그렇게 자재를 준비해놓고 아는 목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거푸집 작업을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수가 이틀간 일을 해줘서 무사히 거푸집을 완성했습니다.
그때 목수에게 품값으로 지불한 16만원이 사내가 지금까지 지불한 인건비의 전부입니다.
사내는 이틀 더 철근을 꼼꼼히 넣고 레미콘을 불렀습니다.
씩씩하게 올라오던 레미콘차 결국 마의 백미터 구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다가 돌아가 버렸습니다.
길이 바짝 마른날 펌프카를 불러놓고 레미콘을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그래서 비가 안오고 낡이 맑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열흘을 지나서야 기초공사를 마쳤습니다

나무 껍질 벗기기

거푸집을 뜯어낼 무렵 나무가 도착했습니다.
5치(가는 곳의 두께가 15센티), 12자(3미터 60)의 낙엽송 150개를 역시 5치로 양면치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쌓기 편하게 양면을 친 겁니다. 개당 만 칠천원쯤, 모두 2백 5십만원 가량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걸로 벽체 쌓을 나무는 전부 마련된 것이었죠. 껍질을 벗겨서 열십자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수퍼에 들러 빵과 김밥을 사들고 집터로 가서 껍질을 벗기다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대략 마른 나무는 혼자서 들기에 부담이 없었는데 덜 마른 것들은 밧줄을 묶어서 질질 끌며 이동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껍질을 벗길 때 근육을 통해 전해지는 단단한 섬유질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낙엽송은 작업중 손에 가시가 자주 박힐 정도로 잘게 잘게 부서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단단하다는 얘기겠지요.
사내의 집에는 낙엽송과 잣나무를 썼습니다. 싸니까요. 잣나무와 낙엽송은 양파와 대파의 차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잣나무는 무르고, 낙엽송은 단단합니다. 잣나무는 성기고 낙엽송은 구성이 치밀합니다.
잣나무는 껍질이 두텁고 낙엽송은 아닙니다. 무른 놈은 두터운 껍질을 필요로 하고 야무진 놈은 아닌 모양입니다.
자작나무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껍질부터가 종이처럼 얇게 쪼개집니다. 추운데 사는 놈들은 다릅니다.
책 한권이 같은 두께의 나무 보다 더 단단한 것 처럼. 지어놓고 나도 다르더군요.
비를 맞아도 낙엽송은 거의 변함없는데 잣나무는 푸른곰팡이 때문에 금방 푸르죽죽 변하더군요.

낙엽송은 주로 박정희때 심은 일본이깔나무를 말합니다. 북녘으로 가면 우리 이깔나무가 많습니다.
뭐, 우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질이 다르다는 거지요.
무른 놈은 무른대로, 단단한 놈은 단단한 대로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는 놈은 그 쓸모없음을 쓸모로 한다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렇게 껍질을 벗겨서 쌓아놓고는 담배를 피워물고 산을 바라봤습니다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또 한대, 또 한대..... 주머니에 못 한 박스 살 돈마저 없이 다 떨어져 버렸거든요.
"하늘이 내게 나무를 바짝 말릴 시간을 주는 군!"
그렇게 편리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사내는 소주 한잔 먹고 쓰러졌다가 다음날 품팔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벗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공사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그걸로 지난해는 끝이었습니다.

얼추 공사비를 벌었다 싶어서 내려갔지만 이번엔 눈이 가로막았습니다. 동네 사람들 말하길,
"거기에는 4월이나 되어야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하여간 무지하게 눈이 왔습니다. 1미터가 넘게 쌓인 곳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저 많은 눈이 봄이 된다고 녹을까......?
잡설이 길었습니다. 하여간 혼자서 집짓는 얘기는 또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모양입니다.
3월말에 텐트를 옮기고 4월 1일에 처음으로 톱을 손에 잡았으니까요.
다음에 쓰지요. 그런데 며칠간 집안에 일이 있어 서울 왔다가 심심풀이삼아 썼는데, 내일 아침에 돌아가면 언제 또 쓰지요?
아시다시피 거기선 인터넷이 안되는데......그럼.

이틀간 저녁에 썼다가 면에 일이 있어 내려온 김에 복사해 갖다 붙였더니 좀 길어졌습니다.
시작은?
아직도 응달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던 지난3월말 드디어 텐트를 옮겼습니다. 길고 긴 겨울, 그리고 기다림이었습니다.
3월 31일 아침 일찍, 씌웠던 천막용 커버를 벗기자 5달 동안 겨울바람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햇살을 받았습니다.
처음이란 확실히 좋습니다. 하얀 백지위에 붓을 드는 가슴 떨림처럼, 대지위에 근육으로 글을 써가는, 그렇습니다.
집짓기도 문학이고 노래입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리듯 나무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가늠하다가, 어느 순간 먹줄을 튕깁니다.
시작입니다. 시작은 항상 가슴 벅찹니다.


사내는 신발을 조여 매고 못 주머니를 차고 고리에 망치를 끼웠지요.
그리곤 체인톱의 스위치를 누르며 스스로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촌스럽게 사진 한방 찍고 싶었습니다.
수컷들이란 의례 그런가 봅니다. 수컷 공작새는 깃털을 한껏 세우고 장동건은 폼 나게 엔진톱을 돌리다가 하늘을 응시하지요.
말보루 담배갑 표지 그림이 시사하는 것 말입니다.
어깨엔 견장이며, 가슴엔 요란한 표식과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페라리에 흥분하던 알 파치노나 조금은 초라하지만 못 주머니에 망치 걸고 체인톱 돌리면서 으스대고 싶어하는 사내나 그리움이 향하는 밑바닥에는…..그래, oo의 향기.
사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무를 누릅니다. 톱밥이 튑니다. 가볍게 날아 흩어집니다

벽체 쌓기
하루 10개씩만 쌓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보름이면 벽을 다 만듭니다. 하방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거 품 많이 듭니다.
첫줄부터 엇갈려 쌓았습니다. 반턱맞춤, 그런 거 할 리가 없습니다. 무지하게 품 많이 듭니다.
나무가 짧으면 밑에다 나무 하나 가로 걸쳐놓고 그대로 210미리 직결나사 두어개 찌르고 대못 마구 때려 박아 넣었습니다.
계획대로 하루 10개씩 무난히 쌓아 갔습니다. 귀틀집이 편한 건 높은 곳에 나무를 올리는 작업도 혼자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미 쌓은 벽을 사다리 삼아 한 계단씩 밀어올리거나 끌어올리면 웬만큼 무거운 나무도 혼자서 다 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내가 귀틀집을 짓기로 결정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전통 건축에 대한 미학 따위는 갖질 못했고, 건강이나 자연친화적인 따위의 유행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혼자서 싸게 지을 수 있는 집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대충대충 지어도 안 무너지고, 따뜻하게 할 수 있고, 보기도 크게 흉하지 않은 집…..그런 집을 지어서 향기 맡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벽체를 쌓기 시작하면서 공학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긴 나무의 전체적인 중심을 기준으로 수직을 맞추며 쌓아 올려야 하는지, 귀를 트는 부분에 수직을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운 적도 없고, 그 흔한 집짓기에 관한 책 한권 없었거든요. 이리보고 저리보다가 그냥 수직자를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냥, 대충 눈대중으로 봐서 크게 균형이 어긋나지 않으면 귀를 트는 곳에도 맞추고, 벽체에도 맞추다가 이도 저도 아니면 반반씩 절충해서 맞추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직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때부터 벽체를 다 쌓을 때까지 먹줄하나 튀기지 않고 쌓았습니다. 먹줄과 자를 버리고 눈을 믿었고, 눈으로도 알 수 없을 땐, 기울어진 집에서도 행복하게 살면 그만아니냐며 넘어갔습니다.
집이 부실해서 웃음꽃이 안피더냐, 뭐 그런 배짱이었습니다.
집은 대충 짓더라도 사는 건 알차게 살자, 그런 주의였습니다.

그렇게해서 150개의 나무를 혼자서 비오는 날을 포함하여 보름도 안되는 기간에 쌓아 올렸습니다.

천정 만들기
또 나무를 사왔습니다. 천정과 지붕할 나무입니다. 천정은 현대식으로 수평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사내는 천정을 다 만드는 순간까지 전통 가옥들은 천정서까래라고 해서 경사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책 없는 사내였습니다.
천정은 최소한의 나무만 걸치고 그 위에 일부는 루바를 대고, 일부는 대패나 그라인더 페퍼질도 안한 송판을 올렸습니다.
이땐 정말 누가 한쪽을 잡아주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밑에서 위로 다람쥐처럼 오르락 내리락, 왼쪽에다 못 하나 박아서 고정시켜놓고 다시 오른쪽 끝에 가서 발로 밀어서 고정시켜 놓고 못을 박고 다시 왼쪽으로….반복 또 반복…..그렇게해서 3백여장 되는 송판에 10개 정도씩 못을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그 위에다 흙 못 올렸습니다. 혼자서 천정에 흙 올리는 건 정말 독종들이나 하는 겁니다. 그냥 스티로폼 올렸습니다.
각목으로 상을 대고 50미리를 올리고 다시 엇갈려서 50미리를 더 올리고 그 위에 합판으로 마감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비가 여러 번 왔습니다. 루바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서야 비가 오면 천막을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는 둥 마는 둥 할 때, 더덕밭에 막 싹이 트는 잡초들을 제거했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떳떳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누가 봐도 저 놈은 집만 짓고 있네, 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도 같고. 이상하지요?
귀농을 한 것도 아닌데.
아마 사내에게도 여전히 일일부작 일일불식 따위의 금언들이 만들어내는 노동,
그것도 농사에 대한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매지는 않았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바로 사회의 잡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부지런한 농사꾼과 같다면 내가 어떻게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살겠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게지요.
그렇게 4월이 여물고 있습니다

지붕만들기
지붕은 천정에서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걸어서 서까래를 박기로 했습니다. 기둥과 도리감으로 잣나무 원목을 사왔습니다.
6치짜리로 해서 12자 짜리가 6개 있고, 5미터에 이르는 특수목을 5개 가량 샀습니다.
당초에 맞배지붕을 할 요량으로 샀는데 합각지붕으로 변경했습니다.( 계산을 잘 못해서 목재도 잘 못 사온 탓인데 덕분에 맞배지붕을 할 경우 생기는 천정과 지붕사이의 세모꼴 공간이 없어져서 뒷날 공간 메우는 일을 덜었습니다.) 첫번째 작업은 목재 옮기기 입니다.
목재운반 트럭이 마의 백미터 구간을 올라오다가 힘이 부쳐서 중간에 마구 떨어뜨려 놓고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승용차(트럭이 없습니다. 처분하고 중고트럭이라도 구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워낙 압류 걸린 것이 많아서, 거의 대포차 수준입니다)에다 와이어를 걸고 하나씩 하나씩 끌어올렸습니다. 타이어 다 해먹었습니다. 타이어가 심하게 마모되면 철심이 보인다는걸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요. 다음은 그 나무를 천정위로 올리는 작업입니다.

가는 곳이 18센티 정도하고 굵은 쪽은 30센티씩 하는 5미터 짜리 나무를 2미터가 넘는 천정위로 올릴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더군요.
들지도 못해서 지렛대로 굴려서 조금씩 옮겨야하는 판인데……그래서 체인브럭이라 부르는 도르레를 빌려 왔습니다.
도르레를 걸 수 있는 지주목을 높이 세우고 나무를 한쪽이 좀 기울어 지도록 매달아 끌어 올렸습니다

천정보다 더 높이 나무가 올라갔을 즈음 나무의 가벼운 쪽(높은 쪽)에 줄을 걸어 밑으로 힘껏 당기면서 90도를 확 돌려버렸죠.
무게중심에 따라서 나무는 천정위에 떡 걸쳐지더군요. 그래서 천정에 올라가 슬슬 도르레를 풀면서 나무를 천정 안쪽으로 옮겼죠.
그렇게 나무를 다 올렸습니다. 도르레, 역시 몇 사람의 몫을 해내더군요.
참, 도르레 얘기를 하다 보니까 도르레와 관련하여 장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도르레가 편리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도구에 의존하다 보면 그 도구로 인한 일이 또 생긴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돈을 벌자니 자동차가 필요하고, 자동차를 끌고 다니자니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휴대폰도 그렇고….우리의 일상이 다 그런 걸…..

적당히 쓰고, 적당히 외면하고 사는 밖에요.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겠다는(향기는 빼고)!

하여간 사내는 그렇게 나무를 올려놓고 "내가 신라시대로 돌아갔군!"하고 중얼거리며 맛나게 담배를 피웠습니다.

여기서부터 전통적인 한옥의 기법입니다. 촉 파서 기둥 세우고, 십자매기해서 도리 얹었습니다.
먹줄도 튀겨가면서…..목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못 주머니도 했겠다, 사귀도 틀줄 알고 십자매기도 하니 어디가서 목수라고 제법 일당 좀 받겠다 싶더군요.
이제 시다바리는 끝이다 싶었죠. 하여간 사내들이란…..
어쨌건 그렇게해서 마지막 도리, 마루보라고도 하는 상량을 하던 날
인근에 사는 역시 날나리 목수가 와서 도와줘 거뜬히 상량을 했습니다

혼자서 들 땐 별의별 쇼를 다해가면서 올려야 했던 5미터짜리 나무가 둘이서 하니까 왜 그렇게 간단히 올라갑니까?
그날이 5월 1일입니다. 처음 나무를 쌓기 시작해서 상량까지 한 달하고 이틀 걸렸습니다. 상량문, 아직 안 썼습니다.
문방구를 가야 하는데, 자꾸 까먹습니다.
이렇게 쓸까 합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그런데 괜히 별 것도 아닌게 폼잡는 거 같아서 이렇게 쓸까도 고민중입니다.
"가볍구나, 좋다! 구름이로다!" 별 거 아닙니다. 사내의 집에서 볼 거라곤 구름밖에 없습니다. 매일 구름 바라보며 나오는 탄성입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깨도 아프고 팔은 근육이 뭉쳤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헌데 비는 자주 오고…..쉴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서까래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강행군입니다.
그래서 열흘후에 지붕에 방수쉬트를 좍~깔았습니다(2평짜리 2층 다락방 만들 공간을 제외하고).
지붕 역시 서까래위에 널판지대고 50미리 스티로폼 넣고 그 위에 합판마감하고 방수쉬트를 깐 구조입니다.
나중에 너와식으로 피죽을 올릴까 합니다. 그게 아스팔트 슁글보다는 재료비가 훨 싸더라구요. 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그렇게 해놓고 6월초까지 빈둥거리듯 느긋하게 일했습니다.
조금씩 집짓는 일도 하고, 뒷 밭에 옥수수, 고추, 열무 등등 심고, 더덕밭에는 섶도 줬습니다.
밭 일을 하고 나니까 밀릴 숙제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집짓는 일보다 두배는 더 재미있습니다. 내년엔 그 재미 많이 볼 수 있겠죠.

왜 2층을 만들고 싶었을까?

사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하여간 반드시 2층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건 욕망입니다.
다른 높이에서 뭔가를 응시하고 싶었을까요? 꼭 그것 때문은 아닐겁니다. 티비에 보면 근사한 집에는 꼭 2층이 있지요.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행위가 나옵니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 거기엔 분명치 않지만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욕망의 통로 아니면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거나, 뭔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어쩌면 10만년전 현생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 살았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열대우림의 나무 위? 땅으로 내려온 인류가 그 나무 위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하여간 사내도 2층으로 오르는 통로를 만들고, 거기다 두 평 남짓한 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집은 남향이지만 2층방은 북향입니다. 집 귀퉁이에 만들었기 때문에 앞에서는 안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오는 사람들은 2층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뒷곁에 있는 우물에 물을 마시러 와서야 놀란 눈으로 "어! 2층이 있네?"하곤 합니다. 사내는 지금 그 2층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집안에 있는 계단을 통해 오르지만, 머지않아 밖에다 수직계단을 놓고 창문으로 드나들 계획입니다.
2층 침대에 있는 것과 같은 수직계단 말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빗나가고 싶은 욕망인가요? 머리아픈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가로지르고, 선분을 타고…..
뭐 그런 거. 대체로 이층은 일층을 지배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의 해방구입니다.

비로소 큰 숨을 내쉬고 잡담을 하거나 문걸고 인터넷 하지요.
또 신혼부부들이 시부모로부터 벗어나 이층계단을 오르는 순간은 어떻습니까?
한 두 계단 오를 땐 조심스럽다가도 마지막 계단쯤에선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급하게 ….
 왜 이층이 현실에서 그렇게 작용하고 있을까요? 사내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도, 처용의 아내가 아니라도 몰래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필요하다는 것이 사내의 생각입니다. 관리되지 않는! 혹은 눈 감는! 또 혹은 기꺼이 눈 감아 줄 수 있는! 아마, 당신도 집을 지으면 작게라도 2층을 만들고 싶어질 겁니다. 도시를 떠난다는 건 어쩌면 그 이층방으로 오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숨쉬기, 탈출하기, 중심에서 벗어나기, 주류에 등돌리기, 아이처럼 살기….등등. 물론 사내의 생각입니다만.

아, 2층이요? 귀틀로 올리지 않고 목조주택 형식을 빌렸습니다.
 하중을 적게 받도록 기둥세우고 각목으로 틀을 잡아 스티로폼넣고 양쪽에 합판으로 마감했습니다. 난방시설은 없습니다.
뚝딱뚝딱 아주 간단합니다. 2층을 안 만들었을 경우와 비교하면 문달고 창문다는 비용까지 쳐서 최대로 백만원 가량 더 들었을 겁니다. 평당 50만원입니다. 만들 만 하지 않습니까?
계단은 8치짜리 통나무 하나 비스듬히 세워놓고 발 밟는 곳만 홈 파듯 날렸습니다.
계단값 재료비 달랑 3만 2천원입니다. 혼자서 8치짜리 나무 세우느라고 낑낑거린 고락은 0원이고.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는 흙치기와 구들놓기, 야외화장실 만들기입니다. 그걸로 산촌사람의 혼자서 집짓기는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아직 거기까지밖에 진도가 안나갔거든요. 여기까지 읽은 분에겐 고맙다고 해야 겠죠. 고맙습니다. 사내의 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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